삼남대로는 조선시대 6대 대로(大路) 중 한양과 충청 · 전라 · 경상의 삼남지방을 이었던 천 리에 달하는 길이다
조선시대 육로교통의 중심축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젊은 선비들이 이 길을 걸었고 삼남지방의 풍부한 물산도 이 길을 오갔다
또한 이 길은 정조께서 아버지 사도세자를 참배하기 위해 현릉원으로 행차하던 길이며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던 길이고, 삼봉 정도전,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떠났던 길이며
암행어사가 된 이몽룡이 남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던 길이기도 하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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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경기도 삼남길은 과천 · 의왕 · 수원 · 화성 · 오산 · 평택을 연결하는 총거리 100km, 10개 구간으로
삼남대로의 옛 노선을 연구 고증하고, 그 원형을 최대한 따르면서
고속도로 등으로 단절된 구간 · 도보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구간 등을 대체로로 개척하여 역사문화탐방로인 경기도 옛길 삼남길을 개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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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길은 지지대비에서 출발하여 서호공원 새싹교까지의 길로 삼남길 안내서에 거리 8km · 소요시간 2시간으로 나와 있다
골사그네 버스정류장
골사그네는 지지대고개 아래에 자리잡은 삼태기처럼 생긴 마을이다
산세가 혐악하고 산림이 우거져 맹수의 피해가 심해 사람들이 안주하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전주이씨 · 마씨 · 경주배씨 등이 처음으로 세거한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왕륜면 곡사동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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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이다
지지대고개
정조임금이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을 찾았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자꾸 행차를 늦췄다는 이야기에서 이름이 유래한 곳으로 정조의 애틋한 효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지대비각(遲遲臺碑閣)
지지대비는 조선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 7년(1807)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워진 비다
정조는 생부인 사도세자 능인 화성의 현릉원 참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만 넘어서면 멀리서나마 능을 볼 수 없게 되므로 의례 이곳에서 행차를 멈추었다고 한다
능을 뒤돌아 보며 이곳을 떠나기를 아쉬워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이르면 왕의 행차가 느릿느릿하다 하여
한자의 느릴 지(遲)자를 두 자 붙여 「지지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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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비가 옆에 있다
지지대쉼터
로터리 100주년 기념탑
1905년 2월 23일 시작된 로터리의 지난 100주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의 봉사를 약속하고자
수원지역 로터리안들이 「초아의 봉사」 정신을 이곳에 세웠다
로터리 100주년 기념탑에서 산으로 든다
화선봉 방향안내판
삼남길 리본
장안로
오른쪽에 있는 해우재를 보고 다시 나와야 한다
해우재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의 유지에 따라 만들어진 화장실 문화전시관이다
전시관 건물 자체가 변기 모양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시관 내 · 외부에는 화장실을 주제로 한 다양한 전시물들이 있다
미스터 토일렛 심재덕의 출생의 비밀
외갓집 뒷간에서 출생하여 얻은 이름 개똥이!
수원시장 재직시 시작한 화장실 문화운동에 정열적으로 매진하여 세계 언론으로부터 얻은 별명이 미스터 토일렛(Mr. Toilet)이다
노둣돌(신라시대 BC 57~AD 935)
귀족여인들이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세식 화장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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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 야외전시관이다
통시변소
제주도에서 주로 사용하며 돌로 벽을 만들고 돼지를 키워 인분을 소비하는 가장 자연 친화적인 화장실이었다
아기 똥을 핥아 먹고 있는 개
우리나라에는 똥개가 등장하는 속담이 많은데 「시집가기 전에 강아지를 장만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아기를 낳으면 똥을 먹일 개가 필요해서 결혼할 때 강아지 한 마리를 챙겨 가는 풍습에서 기인한다
해우소 2층 전시실
요강이야기
요강은 오줌을 받는 실내용 용기를 뜻한다
요강의 재료는 도기 · 자기 · 유기 · 나무 · 칠기 등 다양한 편으로 어느 시대에나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요강은 방에 비치하는 것만이 아니고 가마로 여행할 때 · 의료용 등 다양한 장소에서 사용되었다
한반도 지형에서 요강은 삼국시대 유물에서도 발견될 만큼 오래된 생활용품으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필수품이었다
서양 또한 요강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중세 사람들은 요강을 비울 때 오물을 창밖으로 던지곤 해
사람들은 바닥에 쌓인 오물을 피하기 위해서 하이힐을 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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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 중국 · 일본 · 서양의 오강이 전시되어 있다
신기한 세계의 화장실 문화
삼남대로 안내판
조선시대 대로 중 한양과 충청 · 전라 · 경상의 삼남지방을 이었던 천리에 이르는 긴 길이다
삼남길 이야기 / 괴목정교(槐木亭橋) 이야기
정조의 능행차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담긴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보면
능행차를 떠난 정조 일행이 사근행궁에서 점심을 먹은 후 빗길을 뚫고 미륵현(지금의 지지대고개)과 괴목정교를 넘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괴목정교는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의 버스차고지 근처에 남아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다리이지만, 이 다리는 한양에서 수원으로 넘어올 때 반드시 넘어야 했던 삼남대로의 중요한 다리 중 하나였다
괴목정교라는 이름은 근처에 괴목정(槐木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자리에 세워져 있던 괴목정교 표석은 현재 수원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이목2교
이곳부터 서호천을 따라간다
서호천을 따라 걷는 빅터
삼남길 이야기 / 수원의 상업과 수원갈비
수원갈비의 시작은 1945년 문을 연 「화춘옥」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수원의 농업 관련 기관을 자주 찾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에서 갈비를 자주 먹으면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탔다
1906년 10월 17일자 황성신문 기사 중에 "수원은 삼남대로의 요충이고 사방의 물산과 재화가 모여드는 곳이라
성 내외에 시장이 2개 있어서 곡식과 포목 · 생선 · 소금 · 소 등의 물품을 매매하는 것이 자못 경성 이외의 대도시에 견줄지라"라는 기사가 나온다
수원은 삼남대로의 요충에 위치했기 때문에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우시장이 크게 형성되었다
다시 말해 수원갈비는 수원이 누렸던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서친정(西親亭)
솟대공원에서 이동식을 했다
서호천
이동식 후 서호천을 따라간다
서호천
여기산
예전 농촌진흥청 동쪽에 위치한 해발 50여 미터의 자그마한 야산으로
중백로 · 쇠백로 · 해오라기 · 황로 · 왜가리가 서식하고 있는 백로 서식지가 있다
수원성감리교회
서호천 조망대에서 봤다
경기도 삼남길 제4길(서호천길) · 경기도 삼남길 안내판
제4길 마침점인 새싹교 앞이다
경기도 삼남길 제5길(중복들길) · 수원팔색길 안내판
제4길을 마치고 우장춘 박사 묘를 거쳐 서호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서호
새싹교에서 봤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
우장춘 박사(1898. 4. 8∼1959. 8. 10)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박사이자 세계적인 유전 육종학의 권위자로서 〈종(種)의 합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유전 육종학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종자를 국내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종자의 생산 체계를 확립하였고
채소를 제철에 관계없이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우리나라 육종 및 원예산업 발전에 공헌하였다
고랭지를 이용한 무병(無病) 씨감자 생산 및 재배 체계 확립으로 6 · 25전쟁 이후 우리나라 식량난 해결을 주도하였다
녹색혁명의 주역 김인환 박사 묘
1971년 통일벼 개발보급에 성공하고 1977년 주곡인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하는 녹색혁명을 성취하여 당시 어려움을 겪던 식량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통일벼」를 보완한 다양한 다수확 신품종을 지속적으로 개발하였으며
농업 과학기술이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중앙과 지방을 연계하는 보급체계를 확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농업 과학기술 개발 보급에 몸담고 있는 후학들을 위해 농촌진흥청에 「송암장학회」를 설립 운영하여 후진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축만교(祝萬橋)
축만교 밑에 서호 수문이 있다
항미정(杭眉亭)
항미정은 순조 31년(1831)에 당시의 화성유수 박기수(朴綺秀)가 건립한 정자로
그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蘇東波)의 시구에 "서호는 항주(杭州)의 미목(眉目)같다"라고 읊은데서 따 지었다고 한다
서시의 눈썹에서 유래한 항미정
서호의 수문 옆에 자리한 항미정의 이름은 송나라의 대문호인 소식(蘇軾)이 중국 항주의 태수를 지낼 적에
항주를 대표하는 절경인 서호(西湖)가 서시(西施)의 눈썹처럼 아름답다고 말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서시는 중국 월나라 미인으로 월나라 왕 구천(勾踐)의 신하인 범려(范蠡)가 서시를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바쳤고
부차가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틈을 타서 오나라를 공격해서 정복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시는 평소 지병이 있어서 항상 얼굴을 찌푸리고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미모가 출중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여인들이 자기도 그렇게 하면 예뻐 보일까 싶어서 너도나도 얼굴을 찌푸리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서시 정도 되니까 예쁜 것이지 못 생긴 사람이 그러면 더 못생겨 보이지 않겠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분수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남을 따라하는 여인들을 비웃었고
여기서 ‘찡그릴 빈(嚬)’자와 ‘찡그릴 축(蹙)’자를 써서 ‘빈축(嚬蹙)’이라는 말이 유래했다고 한다
축만제(祝萬堤) 빗돌
정조 23년(1799) 축만제를 화성의 서쪽 5리의 평지에 축조한다
축만제는 길이 1246척 · 너비 720척 · 높이 8척 · 두께 7척 5푼 · 깊이 7척 · 수문 2개가 설치된 저수지로
이를 통해 농업용수의 혜택을 받은 전답은 232섬지기에 이른다
축만제는 농업용저수지 외에도 낙조와 잉어가 유명하였으며 특히 잉어는 약용으로써 궁중에 진상되었다
서호
여기산 아래 선거관리위원회 선거연수원이 보인다
서울대 작물시험장
꼬리명주나비 서식지 안내판
삼남길 이야기 / 서호 가마우지 서식지와 여기산 백로 서식지 안내판
서호천 가운데 떠있는 인공섬은 사람의 발길이 제한된 철새들의 낙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수많은 민물가마우지 둥지에서 떨어지는 배설물들은 때로 섬의 90%이상을 차지하는 아까시나무를 포함한 초목들의 위를 하얗게 덮기도 한다
또한 여기산은 해발 50여 미터의 자그마한 야산으로 중백로 · 쇠백로 · 해오라기 · 황로 · 왜가리가 서식하고 있는 백로 서식지가 있다
이처럼 도심지 가까운 곳에 백로 서식지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서호와 서호천에서 활발한 먹이활동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로는 2급수 이상에서만 먹이활동을 하는데 이를 통해서도 서호와 서호천의 자연환경이 그만큼 우수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철새전망대
물가에 앉은 민물가마우지
서호에서 만날 수 있는 새와 물고기 안내판
민물가마우지 · 인공섬
새마을지도자 연수원 터
1973년 4월부터 1983년 3월까지 새마을 국민교육을 실시한 곳으로 일 주일 내외의 합숙교육을 총 550회 실시 · 총 55,851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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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공원 입구에 있다
화서역
마침점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13.8km, 소요시간 5시간 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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