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산(372m) 아래 위치한 죽주산성(경기도 기념물 제69호)을 다녀왔다
대중교통이 불편하여 승용차를 이용했기에 가까운 성은사 · 매산리석불입상 · 죽산향교 등을 둘러봤다
송문주 장군 동상
송문주 장군은 1231년(고종 18) 몽골군의 1차 침입이 있자 귀주성 박서 장군 휘하에서 종군하여
몽골군을 격퇴시킨 공로를 인정 받아 단계를 뛰어넘어 낭장(郎將)에 임명되었다
1235년(고종 22) 몽골군 3차 침입이 시작되었고, 이에 송문주 장군은 1236년(고종 23) 죽주방호별감으로 부임하였으며
그해 9월 몽골군이 죽주성에 쳐들어 왔다
송문주 장군은 적의 맹렬한 포화와 화공을 잘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기습적으로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몽골군은 성을 포위 공격한지 15일 만에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다
송문주 장군은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적이 어떤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방법으로 이에 응전하라"라고 지시하면
적은 과연 그의 예측대로 공격해와 성안에서는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일컫게 되었다
송문주 장군은 죽주성 전투에서 주민들과 일치 단결하여 거둔 대승으로 또 다시 좌우위장군에 봉해지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에 죽주민들은 옛부터 죽주성안에 충의사를 짓고 매년 9월 9일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진천송씨대종회에서도 죽주민들에 대한 감사와 조상의 전공을 기리며 이 제례에 참례하고 있다
죽주성 전투의 승리는 송문주 장군의 지혜와 용맹함이 돋보였던 전투였을 뿐만 아니라 안성의 명예를 드높인 전투였다
죽양대로
비석거리
죽산부사 심능석 · 목장흠 · 죽산현감 목성선 등의 선정비 등 9기가 세워져 있다
예로부터 죽산은 삼남요로보장지진(三南要路保障之鎭)이라 하여 기호지방과 삼남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죽산은 한양과 충청도 · 경상도 · 전라도를 잇는 삼남대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
이곳에 사시는 남양홍씨 35대 종손부의 말씀으론 일반인들은 비석거리라 하지만 우린 「비선거리」라고 하시며
청주와 충주에서 한양으로 과거 보러 올라갔던 사람들 중 급제자들이 귀향하며 세운 13기가 있었는데
그 게 뭐 돈이나 되는 줄 알고 훔쳐가서 9기만 남았다고 하시며 「비선거리」도 저쪽이라며 아래쪽 거리를 가르킨다
죽산부사 우홍규 청덕애민선정거사비(府使禹侯弘圭淸德愛民善政去思碑)
죽주산성 들머리 왼쪽에 있다
*
비석거리 9기 중 귀부와 옥개석이 있는 것으로 골랐다
죽주산성둘레길 안내판
죽주산성 들머리 오른쪽에 있다
영남길이야기 안내판 / 상구산 · 하구산 · 미륵당 · 한평마을 이야기
죽주산성 안내판
채제공이 쓴 송장군묘비명에는 몽골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라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죽주산성 철문 옆에 있다
영남길 리본
죽주산성 철문을 지나 동문으로 올라간다
죽주산성 동문
이 성은 고려시대 죽주성으로 불렸으며 몽골군과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던 곳이다
죽주는 청주와 충주의 두 길이 만나는 중부 내륙교통의 요충지였다
죽주산성은 내성 · 본성 · 외성의 중첩된 성벽 구조를 갖추고 있다
원래 성벽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외성뿐이고 내성과 본성은 훼손이 심하게 되었다
현재 성의 둘레는 1,688m · 높이 2.5m 안팎이며 부분적으로 수리를 많이 하였다
죽주산성 내부
죽주산성 테마역사공원 수변공원 등 조성사업 중이다
*
동문에서 오른쪽 포루 방향으로 돌았다
신출귀몰한 장군, 신명(神明) 송문주 안내판
"오늘 적이 어떤 기계를 쓸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방법으로 이에 응전하라"라고 지시하면
적은 과연 그의 예측대로 공격해와 성안에서는 모두 그를 신명(神明)이라 일컫게 되었다
송문주 장군은 죽주성 전투에서 주민들과 일치 단결하여 거둔 대승으로 또 다시 좌우위장군에 봉해지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죽주산성
계단을 오르면 보수한 동벽(2008. 7. 1~2009. 4. 20)이 나온다
보수한 지 9년이 지났어도 아직 성벽의 돌 색상이 다르다
영남길 리본
일죽 방향
중성 북벽포루 조금 못미처에서 봤다
안성 · 용인 지역
앞에 장광저수지 뒤로 마국산(馬國山)이 보인다
마국산은 마국의 산이라는 말로, 삼한의 마한을 의미한다
중성 북벽포루 옆에서 봤다
중성 북벽포루
포루 하단에 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이 보인다
고사목이 여러 전투를 겪은 포루를 위로하 듯 서있다
북문
포루에서 잠시 걷자 보인다
서문
방향안내판이 서있는 언덕 오른쪽으로 숲에 가려진 외성 서문이 보인다
비봉산 정상 · 남문지 방향안내판
외성 서문
갈림길에서 비봉산 방향 바로 밑에 있다
서문에서 남문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비봉산
오른쪽 언덕이 방향안내판이 있던 곳이다
죽산면
멀리 칠현산 · 칠장산이 보인다
남산 · 죽림산 · 마이산
남문
이곳부터 공사중이라 출입금지다
성벽 공사중인 남문과 동문 사이다
남산 · 죽림산
앞쪽은 나무를 베고 진달래를 심어 놓았다
죽주산성 공원화계획의 일환인 것 같다
일죽
성벽을 따라 한 바퀴를 돌았기에 이동식을 하고 산성 내부를 돌기로 했다
탁자가 있는 벤치에서 이동식을 했다
성곽과 수변공원을 만드는 사람들이 쉼터로 사용하는지 안전모가 걸려있다
이동식 후 잠시 누워 휴식 중이다
충의사(忠義祠)
송문주 장군 사당으로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정조 때 문신이자 수원 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채제공 선생이 쓴 번암집(1791)의 송장군 묘비명으로 추측컨데 송 장군 사후(1200년대 후반)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충의사 벽면 그림
송문주 장군이 물리친 몽골과의 전투가 그려져 있다
성은사
죽주산성 안에 있는 예전 성은사 자린데 죽주산성 공원화사업을 하시는 분의 말로는
이곳에 다시 들어올려는지 요즘 건물을 손보고 있다고 한다
왼쪽 대웅전 오른쪽이 요사채다
중성 동문
이제 죽주산성 밖에 있는 성은사로 간다
성은사 대웅전
바위와 어울어진 꽃으로 조경이 아름다운 사찰이다
이제 매산리석불입상을 만나러 간다
영남길이야기 안내판 / 두려움을 없애고 소원을 들어주는 태평미륵
안성은 과거 팔만구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문화가 발전하였는데 특히 미륵이 많아 '미륵의 고장'이라로 불렀다
안성 전역에 약 19구의 미륵이 분포하는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미륵이 있는 도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매산리석불입상」은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명복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 전한다
이 미륵은 「태평미륵」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에는 중앙관리들의 출장 시 숙소를 제공하던 역원(驛院)인 태평원(太平院)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매산리석불입상 입구에 있다
매산리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7호)
미륵당이라 부르는 높은 누각 안에 모셔진 높이 5.6m의 미륵불상이다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것으로 정해져 있는 미륵은 보살과 부처 두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 모습 또한 보살상과 불상 두 가지 형태로 제작되는데 이 입상은 보살상으로 만들어졌다
얼굴에 보이는 평면적인 조각수법과 부조화, 신체의 크기에 비해 좁은 어깨 등은
충남 논산의 개태사지석불입상(보물 지219호)과 비슷하여 고려 초기 석불양식을 잘 보여준다
*
미륵당오층석탑(향토유적 제20호)
일반적 형식의 석탑으로 화강석 각 부재가 정연하고 짜임새 있게 결구되어 있으며, 규모는 작은 편이다
옥신과 옥개는 각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지금의 1층 옥신에는 양우주의 선각이 희미하게 나타나있으며, 2~4층의 옥신석은 결실된 상태이다
5층은 옥신 · 옥개석이 동일석이다
이 석탑에서는 건립시기와 후원자를 알 수 있는 탑지석이 출토되었고 탑지석은 지금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건립 년대는 993년이고, 석탑 전체의 높이는 1.9m이다
지금의 위치가 원위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죽산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6호)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양민 이상이면 향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시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詞章學)과 유교의 경전 및 역사를 공부하는 경학(經學)이 주요 교육내용이었다
향교는 고을의 크기에 따라 학생 수를 조정하였는데 대체로 군에서는 50명, 현에서는 30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명륜당 · 대성전
죽산향교의 상량문 등에 의해 죽산향교는 태종 13년(1413)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이후 임짐왜란 때 불탄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옛 향교가 있던 마을은 구교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죽산향교는 위쪽에 대성전과 동무 · 서무가 위치하고 아래쪽에 명륜당이 위치하여 전형적인 전학후묘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대부분 향교에서 명륜당과 대성전이 같은 선상에 배치되어 있었다면 죽산향교는 명륜당이 주축에서 약간 벗어나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
여러 곳을 들려 넘치듯 즐거웠지만 「죽산순교성지」를 못간 게 아쉬움이다
GPS로 확인하니
걸은 거리 3.4km, 소요시간 3시간 2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