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장사(七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대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현종 5년(1014)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창하였다
칠장사와 칠현산이란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고려 우왕 9년(1383)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조 실록이 이곳에 옮겨졌을 정도로 당시에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특히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역사소설, 일곱 도적과 병해스님 얘기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칠현산 칠장사 일주문
칠장사는 이름에서처럼 칠장산에 가깝지만 칠현산 칠장사다
천왕문 · 범종각 · 제중루 · 극락전
경내 주차장에서 봤다
천왕문(天王門)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경내로 들어서는 천왕문에는 사천왕상을 봉안하고 있다
원래 사천왕은 고대 인도 종교에서 숭상했던 귀신들의 왕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그들은 수미산(須彌山) 중턱에서 각각 그들의 권속들과 살면서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지키며 불법 수호와 사부대중의 보호를 맡게 되었다
칠장사 소조사천왕상(경기도 유형문화제 제115호)
칠장사 사천왕상은 흙으로 빚은 소조상이며 영조 2년(1726)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천왕은 세상 중심에 가장 높이 솟아 있다는 수미산 중턱에 살면서 사방과 4대주(四大洲)를 수호하는 신장(神將)으로
손에는 각각 동방 지국천왕은 칼 · 남방 증장천왕은 용의 여의주 · 서방 광목천왕은 삼치극(三叉戟) · 북방 다문천왕은 비파를 각각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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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 중 남방 증장천왕 · 서방 광목천왕이다
북방 다문천왕 · 동방 지국천왕
범종각
마당 우측, 세벌대 화강암 기단 위에 정면 3칸 · 측면 2칸 · 규모는 21.6㎡로 작지만 무거운 종을 받치기 위해 부재 단면 규격이 다른 건물에 비해 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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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칠장사 범종(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38호)
종신의 명문을 통해 볼 때 1782년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높이가 120cm · 밑지름 75cm인 중형의 동종이다
종 꼭대기 위에 두 개의 뿔을 가진 쌍룡이 여의주를 물고 양 발톱으로 종을 움켜잡고 있다
제중루
경내 주차장에서 가장 잘 보이는 건물로 누각 기둥이 튼실해 보인다
극락전
승용차로 사진 만들기 어려웠다
극락전 꺽정불
임꺽정이 직접 나무로 깎어 스승 병해대사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는 「꺽정불」이다
최근 충북대학교 연구팀이 불상 연대를 측정을 해보니 꺽정불은 조선 중기 약 1540년 쯤 만들어졌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임꺽정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와 일치하여 꺽정불을 임꺽정이 제작했다는 것이 확실시되었다고 한다
오불회괘불탱(국보 제296호) · 삼불회괘불탱(보물 제1256호) · 인목왕후어필칠언시(보물 제1627호)
극락전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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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불회괘불
인조 6년(1628)에 승려 법형이 그린 것으로 길이 661cm · 폭 407.3cm에 크기이며 국내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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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회괘불탱
영축산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영산회상도이다
숙종 36년(1710)에 그려진 마본채색(麻本彩色)의 이 괘불은 길이641cm · 폭 449.2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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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왕후어필칠언시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억울하게 죽은 친정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생각하며 쓴 글이다
자신의 처지를 늙은 소의 고달픔과 애처로운 마음에 비유한 칠언시로
시기는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폐모의 위기에 몰려 칠장사로 피해 있을 때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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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불을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죽림리 삼층석탑(경기도문화재 제179호)
죽산에 흩어져 있던 탑부재를 죽림리 강성원목장에서 관리하여오다 강성원 선생의 기증으로 2005년 11월 28일 지금의 위치로 이전 설치하였다
대웅전(경기도유형문화재 제114호)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조선 후기에 세워져 여러 차례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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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단청이 칠장사의 무게감을 더해준다
대웅전(大雄殿) 현판
대웅전 기단
궁궐 건축의 기단에서는 약간 턱을 두는 정도로 처리하는데 이 건물의 경우는 그 수법이 독특하다
당간대가 앞에 있다
기둥과 주초석
주초석은 전면 4기와 양측면 2기는 잘 다듬은 것이고 나머지 것은 자연석이다
이러한 형태의 주춧돌은 대개 통일 신라에서 고려 중기까지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주춧돌의 형상으로 보아서는 칠장사 창건 때 만들어 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기둥 역시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형태다
종무소
대웅전 왼쪽 건물로 빅터가 보인다
응향각
대웅전과 삼층석탑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지금은 시민 선방으로 개방하여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참선하고 정진하는 곳이다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보물 제983호)
고려 초기 작품으로 원래 죽산면 봉업사 터에 있던 것을 죽산중학교로 옮겼다가 다시 칠장사로 옮긴 것이다
높이 166.5cm · 높이는 206cm로 불상과 광배가 하나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봉업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태조의 초상화를 봉안하였으며 공민왕이 참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거북바위
안성 봉업사 석불입상 옆에 있다
죽림리 삼층석탑(경기도문화재 제179호)
모녀가 탑돌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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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절을 가든 대웅전 기둥을 대고 또는 댓돌에 앉아서 앞에 있는 탑과 함께 앞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
황당한 찬사로 씌여진 문화재 안내판을 읽어보는 것보다 몇 천 곱 가치가 있다"는
유홍준 교수의 글처럼 우리도 댓돌에 앉아서 본 그림이다
탑돌이를 하다 귀엣말을 한다
석탑이 강성원목장 등 불모지에서 오래 머물다 와선지 예배도 아름답다
비로서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아 한을 푼 듯하다
원통전
1725년에 건축된 전각으로,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어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건물은 19세기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오른쪽에 있다
국사전
원통전 옆에 있는 건물로 근래에 지어졌는지 대웅전과는 다르게 단청도 하고 현판도 깨끗하다
열반당 · 명부전
명부전은 1726년 건축된 전각으로, 중생구제의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어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열반당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체다
명부전 목조지장삼존상(경기도유형문화재 제227호)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시보살인 무독귀왕 · 도명존자가 배치되어 있다
목조지장삼존상과 21구의 시왕상
지장삼존상 좌우에 지옥에서 망자의 죄를 심판하는 시왕상이 늘어서 있다
영각(影閣)
낮은 자연석 외벌대 기단과 자연석 초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우물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19세기 말에 재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각에는 칠장사에 논밭을 시주하신 두 부부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영각(影閣) 현판
오십삼불명호비 · 대공덕비
오십삼불명호비는 칠장사를 차지하기 위한 세도가의 방화 후에 불타버린 사찰을 재건하고
탄명 스님이 1793년 칠장사 암자인 「명적암」 아래에 세웠던 비석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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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덕비는 칠장사에 전답을 시주한 두 부부의 공덕비다
칠장사 경내 승탑군
원래 한 기는 혜소국사비각 옆에 있었고, 2기는 경내에 산재해 있던 것을 한 곳에 모았다
원형은 잘 보존되어 있으나 어느 시대, 누구의 승탑인지는 알 수 없다
어사 박문수 합격다리
1723년, 박문수는 25세부터 도전한 시험을 8년만인 32세에 삼수 끝에 진사과에 장원급제한다
박문수의 합격 일화인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길에 이곳 칠장사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그날 밤 꿈에 나한전의 부처님이 나타나 과거 시험에 나올 시제를 알려주어 박문수는 진사과에 급제하였고 암행어사와 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오늘날 나한전은 각종 시험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합격 기도의 명소가 되고 있다
어사 박문수의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
혜소국사께서 칠장사에 계실 때 근처 7도적이 절에 와서 자주 못된 짓을 하던 어느날
도적 한 명이 약수터에서 물을 먹던 중 물박아지가 황금으로 되어있는 것을 보고
몰래 품에 감추어 소굴에 돌아와 보니 평범한 표주박으로 변해 있었다
다음 날에는 다른 도적이 같은 일을 겪고, 또 다음 날에는 또 다른 도적이... 이리하여 일곱 도적이 모여 회의를 한 결과
이는 분명 혜소국사님이 도력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국사를 찾아가 제자가 될 것을 청하였다
이에 혜소국사님은 흔쾌히 허락하여, 일곱 도적은 열심히 수행하여 모두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 혜소국사님이 열반에 드시자, 여러 신도들과 마을사람들은 혜소국사님을 기리려 혜소국사비와 5층사리탑을 건립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일곱 도적, 즉 일곱 나한은 자신의 신통력으로 칠장사의 앞날을 내다보니
오백여 년 후에는 칠장사가 쇠락하는 것이 안타까운지라 모여 의논한 결과
"우리가 칠장사의 쇠락하는 것을 막아보자"하며 각자 홀연히 사라진 자리에 일곱 나한의 형상 석물만 남아 있었다
이 나한 돌형상을 마을사람들이 고이 모셔서 나한기도를 올리고 불공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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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조선 중기 천안의 박문수라는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라가는 길에 칠장사에서 하룻밤을 묵을 때
어머니 말씀도 있으셨고 해서 나한전에 유과를 올리고 나한님께 불공을 드린 후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한님이 나타나셔서 과거시험의 시제 총 8줄의 답안 중 7줄을 를 알려주며 나머지 한 줄은 박문수 니가 알아서 써라 하셨다
다음날 일어나 한양으로 올라가는 내내 나한님이 가르쳐주신 글과 마지막 싯구를 생각해서 쓴 글로 박문수는 장원급제를 한 것이다
칠장사 혜소국사비각(보물 제488호) · 나한전
나한전 · 나옹송
나한전 뒷쪽에는 나옹 스님이 심었다는 수령 620여 년된 소나무가 있다
조선조 500년 동안 칠장사는 3번 전소되었으나 나한전만은 화를 피했다고 한다
나한전 일곱 나한
혜소국사의 일곱 명의 악인이 나한으로 모셔져 있다
혜소국사비각
혜소국사는 972년(고려 광종 3) 안성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 이씨 · 이름 정현 · 10세 출가 · 17세에 융천사(融天寺)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국사는 말년을 칠장사에서 보내면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83세가 되던 고려 문종 8년(1054)에 입적하였다
칠장사 혜소국사비(보물 제488호)
고려 문종 14년(1060) 혜소국사의 입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이 비는
김현이 글을 짓고, 민상제가 글씨를 썼는데, 비문에는 대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흑대리석 비신의 높이 241cm · 폭 128cm · 양쪽 옆면에는 상하로 길게 두 마리의 용을 새겨 놓았는데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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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소국사비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나서 도망을 쳤다 한다
지금 이 비의 몸돌 가운데가 갈라져 있는 이유다
비받침인 귀부
지붕돌
비몸돌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적인 의미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지붕돌에는 거북과 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각 장수를 상징하며
삼계(물 · 지상 · 천상)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비의 주인공인 혜소국사의 영혼을 천상세계로 인도하며 비문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한 의미를 가진다
비전
나한전과 삼성각 사이에 있다
삼성각(산신각)
일반적으로 토속신앙에 뿌리한 산신 · 독성 · 칠성을 함께 모신다
칠장사 경내
삼성각에서 내려가며 봤다
칠장사
경내 주차장에서 봤다
제중루
해우소